금주의 역사스페셜(242호), 1월 8일 1932년(87년전) 이봉창 의사, 일본 국왕에 폭탄 투척,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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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역사 스페셜] 242호
1월 8일 1932년(87년전)
이봉창 의사, 일본 국왕에 폭탄 투척
1900년 8월 10일 출생, 1930년 12월 10일 중국 상해 도착
1931년 1월 상해대한민국임시정부 소속 활동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폭탄 투척,
1932년 9월 30일 사형 선고, 10월 10일 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제1호 한인애국단 단원
독립운동가 이봉창(李奉昌) 의사
1900년 8월 10일 출생, 1932년 10월 10일 순국.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 후손인 부친 이진규 씨와 모친 밀양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상하이 도착
중국 상하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어 조선인들을 도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1930년 12월 6일 일본을 떠나 12월 10일 상해에 도착한다.
1931년 1월초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겸 민단(상하이한인거류민단)사무소를 방문하여 ‘백범 김구’를 만나 독립운동과 일왕폭살 계획을 세운다.
또한 수류탄은 중국군인으로 근무하는 ‘김홍일’의 도움으로 수류탄 2개를 입수한다
1932년 1월 8일 의거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상하이에 있는 안공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결의를 다진다.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일본 도쿄 경시청을 지나갈 때 준비한 수류탄을 던졌으나 위력이 약해 명중시키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된다.
그 해 9월 30일 일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항일독립운동 도화선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7월 2일 발생한 ‘만보산 사건’을 크게 확대하여 한국인과 중국인의 민족간 반목을 조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이봉창 의사 의거’ 소식이 중국에 알려지자 한중 민족간의 감정대립이 크게 완화되었다. 이후 중국정부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기를 되찾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도 활발해졌다.
이 사건으로 그해 4월 29일 거행한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를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1946년 5월 15일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7월 6일 세 의사는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이봉창 의사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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