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역사스페셜(383호) 9월2일 1879년(142년전) 하얼빈의거 안중근 의사, 출생142주년, 황해도 해주,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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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스페셜] 383호
9월2일 1879년(142년전)
하얼빈의거 안중근 의사, 출생 142주년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1910년 3월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순국
안중근(安重根, 1879년9월2일~1910년3월26일)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도마多默)이다.
안중근은 황해도해주부수양산아래에서 진해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융희3)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안중근은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순국
1909년10월26일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하였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다.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 하얼빈 주재 일본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남만주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에게 총격하였다
1910년2월14일뤼순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음.
1910년3월26일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2세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 못해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감옥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1945년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역시 1949년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남북정부는 광복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1962년3월1일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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